본문 바로가기

연극 /인터뷰

[인터뷰YAM #1]이형훈 “‘네버 더 시너’ , 관객 끌고 나가는 힘 있다”

1924년 5월, 시카코에서 아동 유괴 및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20대 초반이었던 네이슨 레오폴드와 리차드 롭은 14세 로버트 프랭스를 유괴한 뒤 살인을 저질렀다. 이후 두 사람은 배수구 안에 시체를 유기했고, 사건 발생 후 배수구 근처에 놓인 안경이 발견되면서 레오폴드와 롭은 유력한 용의자로 체포됐다. 이는 뮤지컬 ‘쓰릴 미’를 통해 다뤄져 이미 관객에게도 익숙한 소재로 자리매김했다.

이번에는 연극이다. 연극 ‘네버 더 시너’는 ‘쓰릴 미’가 다루고 있는 네이슨과 리차드의 관계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이들에게 교수형을 요청하는 검사 크로우와 이를 막으려는 변호사 대로우의 법정 싸움으로 이야기를 확장시킨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Hate the sin, never the sinner)는 대로우 변호사의 변론은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배우 이형훈은 ‘네버 더 시너’에서 레오폴드 역을 맡았다. 극중 네이슨 레오폴드는 매우 지적인 학생으로, 학구적인 반면 지독하게 로맨틱하다. 또 불안하고, 오만하며, 강박적이고 생김새와 목소리가 새와 닮았다고 소개돼 있다. 이렇듯 레오폴드는 자신에게 다가온 롭에게 점점 빠져들고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함께하기로 다짐하는 인물이다. “관객을 끌고 가는 힘이 있다”고 말한 이형훈과 함께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눠봤다.

 


# 같은 소재, 다른 시각…‘쓰릴 미’와 ‘네버 더 시너’

“레오폴드와 롭이라는 친구가 살인을 저지르죠. 그리고 그 사건을 중심으로 검사와 변호사가 각각의 입장을 대변해요. 그렇게 이야기가 진행되는 법정 드라마입니다. 제가 맡은 네이슨 레오폴드는 이미 대본에 그 성격이 다 나와 있어요. ‘새와 닮았다’고 표현돼 있는데 이게 사람에 따라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다양해요. 그게 바로 트리플로 캐스팅된 배우들의 차이이기도 하죠.”

이형훈은 ‘네버 더 시너’로 제작사 달 컴퍼니와 첫 작업을 마쳤다. 그간 연이 닿지 않아 함께 하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제작사 측에서 먼저 연락이 와 참여하게 됐다고. 그는 “아마도 제가 출연하는 다른 작품을 본 것 같다”며 “연락이 와 대본을 먼저 읽어봤다. 재미있게 잘 읽혔다”고 소감을 밝혔다. ‘쓰릴 미’를 보지 않았다던 이형훈은 “뮤지컬을 봤더라면 더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제작사에 물어보니 아예 다른 시각으로 풀어나간다고 해 흥미가 생겼다”고 덧붙였다.

 

 


“‘쓰릴 미’와 ‘네버 더 시너’는 다루고 있는 사건이 같아요. ‘쓰릴 미’는 시즌을 거듭하면서 많은 사랑을 받았죠. 작품이 가진 힘도 컸고, 배우와 스태프 모두의 합이 잘 맞아서 그러한 사랑을 받았다고 생각해요. 때문에 ‘쓰릴 미’가 담고 있는 이야기를 다른 화법으로 풀어내는 것에 걱정이 많았어요. 일종의 긴장감 같은 거죠.”

걱정은 있었지만 확실히 이형훈에게 ‘네버 더 시너’는 매력이 많은 작품이었다. 특히 ‘빠른 템포’가 그를 매료시켰고 작품에 더욱 빠져들게 했다. 그는 “1장부터 27장까지 계속해 시기가 달라지고, 시공간을 넘나들며 이야기를 풀어나간다”며 “‘네버 더 시너’는 ‘살인이 일어났다’는 결과를 보여주고, 이후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교차 편집해 관객을 이끌고 나가는 힘이 있다”고 강조했다. 이처럼 작품의 매력에 빠질수록 그가 마주하는 것에도 차이가 생겼다.

 


“연습할 때는 초연이다 보니 아무래도 극중 인물의 캐릭터를 만드는데 더 집중했어요. 또 롭과 레오폴드의 관계도 심도 있게 그리려 노력했죠. 공연을 올린 뒤에는 큰 그림을 보게 되는데 어떤 이야기로 관객과 만나야하고, 왜 이 시점에 이 공연이 필요한 지 등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연습 때도 느낀 거지만 뒤에 앉아 우리를 바라보는 기자 역할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됐어요.”

배우의 역할은 캐릭터에 집중하는 것. 각자의 역할이 있고,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했을 때 하나의 공연이 완성된다. 이형훈은 그래서 캐릭터를 만들고 만들어진 레오폴드를 중심으로 관계를 형성해 나가는데 힘을 쏟았다. 극중 인물이 돼 그의 삶을 돌이켜보고, 심지어 노후까지 들여다 보며 고민을 거듭했다. 이 과정에서 배우 박은석의 도움이 상당했다고. 이형훈은 “영어를 잘하지 못해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다. 다큐멘터리를 보고 박은석 배우에게 해석을 부탁하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더불어 ‘쓰릴 미’ 무대에도 오른 바 있는 정욱진, 이율 배우에 대한 이야기도 풀어놨다.

 

 


“욱진이는 역할이 달라졌어요. 당해봤으니까 레오폴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잘 알더라고요. 그런 점에서 여유롭게 다가오는 것 같아요. 이율 형은 뮤지컬에서도 롭 역이었죠. 형과 그런 이야기를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쓰릴 미’와 ‘네버 더 시너’의 다른 점은 무엇일까, 우리가 관계를 만들어나갈 때 이 작품에서 더 중요한 관계는 무엇일까 등.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는 동료가 있었기에 ‘네버 더 시너’ 만의 캐릭터를 만드는데 조금 더 수월 했고, 좋은 시너지 효과를 이끌어낼 수 있었죠.”

이번 공연에서 롭 역은 이율, 정욱진, 박은석이 맡았다. 각각의 롭에 대한 느낌 또한 세 배우의 매력 만큼이나 다양했다. 이형훈은 “외로움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는데 사랑에 대한 결핍을 가진 인간이라는 공통점이 있다”고 운을 뗐다. 그는 “그 부분에서 미묘하게 다르다. 욱진이는 더 어린아이 같고, 율이 형은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느낌이다. 은석이 형은 신경질적으로 표현된다”며 “그런 것들이 약간씩 다르다. 결과적으로는 다 외로워 보인다”고 말했다.

 


# 생각의 차이, 대화에서 답을 찾다

이번 ‘네버 더 시너’ 연출은 변정주가 맡았다. 이형훈은 연극 ‘도둑맞은 책’ 이후 다시 한 번 그와 작업을 하게 됐다. 변정주에 대해 그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명확한 사람이다. 그걸 표현할 수 있는 자신감도 넘친다”고 소개했다. 트리플 캐스팅으로 다양한 경우의 수가 나올 수 있는 ‘네버 더 시너’와 변정주의 연출 스타일이 맞아 떨어졌다고.

“캐릭터나 연기적인 것으로 강요하지 않아요. 이야기를 통해 맞춰나가는 편이죠. 같은 배역을 두고도 세 명의 배우가 모두 다 다르게 해석해도, 본인이 납득하고 해낼 수 있는 방향으로 풀어간다면 배우의 의견을 존중해주는 편이에요.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자기의 것을 가져간다는 게 어려운 일이잖아요.”

 

 


연출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이형훈은 친한 형을 소개하듯 편안해 보였다. 실제로도 두 사람은 굉장히 많은 대화를 하며 작품을 준비했다고 밝혔다. 이형훈은 “모든 배우들이 1장부터 번역을 함께 했다. 이후 캐릭터 분석을 하고 연습을 하는 과정에서 맞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연출에게 이야기했다”며 “연출님이 배려를 많이 해줬다. 제가 배우 역할 이상의 것을 말할 때도 있는데 그런 것을 잘 들어준다. 충분히 듣고 자기 생각을 말해주니 의지가 많이 됐다”고 고백했다.

그렇게 대화를 통해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거쳐 무대에 올려진 ‘네버 더 시너’. 배우에게도 남다른 애정을 느끼게 하는 장면이 존재했다. 모든 장면이 소중하겠지만 이형훈에게 1장과 27장이 특별하다고. 롭과 레오폴드의 관계를 말해주기에 이 만큼 좋은 장치가 없을 것이란 그는 “1장에서는 레오폴드가 롭의 눈치를 많이 보고 예민하게 군다. 그러한 관계가 역전된 것이 27장”이라고 설명했다.

 


그의 설명대로, 27장은 레오폴드와 롭의 첫 만남을 다루고 있다.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나게 됐는지 보여줌으로써 사건의 본질에서 벗어나 인간 대 인간의 만남으로 이야기의 중심축이 이동된다. 때문에 사건은 어느새 관객 머릿속에서 지워지고, 그 자리에 오롯이 사람(레오폴드와 롭)이 자리잡게 된다. 범죄는 사라지고 인간 대 인간의 만남만 남는다. 우려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범죄자를 이해하는 순간 범죄는 미화되기 때문.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살인사건들, 굳이 예를 들지 않아도 모두 알다시피 끔찍한 사건들이 많이 일어났죠. 그렇기에 범죄를 미화 시킬 생각은 없어요. 그런데도 관객이 그렇게 느꼈다면 다듬어 나가야겠죠. 작품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입장을 대변해주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대로우와 크로우의 입장이 대립하는, 날카로운 공방전이 펼쳐지길 바랐어요. 각자 자신의 관점에서 사건을 바라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관객마다 관점의 차이가 존재할 것이고, 그 차이가 조금 더 많이 생겼으면 좋겠어요.”

 

 


# 레오폴드와 이형훈

극중 레오폴드는 ‘새’에 관심이 많다. 새를 보고 새를 관찰하고 새를 노래한다. 언어에 특별함을 드러내며 천재성을 자랑하기도 한다. 이형훈은 그런 레오폴드와는 다르다고 손사래쳤다. 그는 “잘하는 건 모르겠다. 장점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우직할 만큼 성실하게 뭔가를 하려고는 한다. 이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며 “못하는 건 확실하다. 사람들과 연락을 잘하지 못한다”고 반성했다. 극중 인물과 다른 만큼 연기 고민은 계속됐다.

“레오폴드는 롭이라는 환상에 쌓여 있는 인물이에요. 철저하게 자신의 모든 삶이. 이렇게 무언가에 빠져 본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빠져 있어요. 롭을 향한 감정도 애증이라고 하는, 열정이나 집착 또는 광기가 서려 있어요. 그런 것을 직접적으로 느낀다면 제 삶이 너무 힘들어질 것 같아요. 간접경험을 통해 표현하고 있지만 그 간격을 줄이고 싶어요. 물론 간격이 ‘0’이 된다면 배우 히스 레저가 그랬던 것처럼 제 자아도 굉장히 흔들리겠죠. 그래도 간격을 최대한 줄이는 것이 배우의 소명이지 않나 생각해요. 그게 숙제인 것 같아요.”

 


이형훈과 레오폴드 사이, 얼마큼의 간격이 존재할까. 이는 공연을 본 관객의 평가에 따라 다를 것이다. 앞서 소개한 레오폴드의 모습은 무대 위 이형훈의 연기를 통해 환생한 듯 생생하게 그려진다. 냉철함이라는 옷을 덧입고 말이다. 특히 범행 전과 후,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변화하는 레오폴드의 감정은 이형훈의 표정과 말투, 행동을 통해 현실감 있게 전달된다.

“레오폴드는 기본적으로 거만한 사람이고, 자기가 지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을 굉장히 자랑스럽게 여겨요. 모든 사람을 아래로 두고 보죠. 살인 당시에는 굉장히 불안해 보여요. ‘나는 할 수 있어’라고 말하지만 막상 그 일이 눈앞에 닥치면 본능적으로 불안해하고 두려움을 느끼게 되잖아요. 마치 절벽 앞에 서서 그 아래를 바라볼 때처럼. 그런 것들이 롭을 통해 행동으로 발화되는 거고. 살인이 끝난 뒤 암전이 되고 첫 번째 장면에서 아이의 시신을 바라보며 ‘피를 맛봤어’라는 대사를 해요. 당시 레오폴드의 감정은 한가지로 표현할 수 없어요. 모든 감정이 휘몰아치고, 그 순간이 지난 뒤 레오폴드는 롭보다 더 현실을 직시하려고 노력했을 거예요.”

 

 


“레오폴드에게 롭은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을 건네자 “상호 보완적인 유기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이형훈은 “롭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제가 생각하는 레오폴드에게 있어 롭과의 관계는 그렇다. 서로 얽혀 있어 한 명이라도 존재하지 않으면 유지될 수 없는 관계”라며 “레오폴드는 하고자 하는 욕구는 있지만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다. 반면 롭은 행동력을 갖췄다”고 설명했다. 마치 흩어져 있던 퍼즐조각이 마침내 제자리를 찾은 것처럼 롭을 만난 레오폴드는 머리로만 생각하던 일들을 실행한다. 그렇게 사건은 벌어졌고, 재판은 시작됐으며 이들은 사형을 면하기 위해 변호사에 협력해야 했다. 그러면서 과거 이들의 이야기가 무대에 고스란히 펼쳐지고, 이들의 속사정이 낱낱이 공개됐다.

“대로우 변호사를 만나고 난 뒤,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요. 그리고 편지를 읽는 장면이 나오죠. 레오폴드는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내고, 롭은 엄마와 아빠에게 보낼 편지를 읽어요. 그때부터 후회까지는 아니지만 현실을 다시 보게 되는 것 같아요. 니체의 초인 사상에 들어가 있던 아이들이 조금 더 자신들이 생각했던 평범한 사람들 시각으로, 또 사회 구성원의 모습으로 자신을 바라보려 하죠. 후회라기보다는 불안감에 가까워요.”

 


사건을 수면 위로 올려놓고, 관객에게 생각의 시간을 제공하는 ‘네버 더 시너’. 극을 연기하는 배우마다 다른 ‘결핍’을 그리고, 거기서 비롯된 ‘외로움’을 받아 발현되는 레오폴드의 변화를 따라가면 또 다른 재미를 만나게 된다. “매력이 너무 많다”는 이형훈은 상상으로만 접한 사건과 무대에서 펼쳐진 현장의 생생함을 강조했다. 그는 “물론 그만큼 보기 힘들 수도 있을 것”이라면서도 “여러 번 보면 그동안 발견하지 못한 인물들의 심리 변화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네버 더 시너’를 볼 계획이라면 충분히 볼만한 매력이 있다”고 거듭 강조하며 인터뷰를 마무리 지었다.

 

 

 

에디터 백초현 yamstage_m@naver.com

<저작권자 © 얌스테이지 YAMSTAGE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