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흐마니노프는 25세 되던 해인 1897년 3월 28일에 ‘교향곡 제1번 d단조(Op.13)’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초연했다. 역작이 될 것으로 기대한 곡은 혹평을 들으며 그는 참담한 실패를 맛봐야 했다. 이후 작곡에 자신감을 잃은 라흐마니노프는 3년간 거의 아무 곡도 쓰지 못했다고 한다. 그때 그를 찾아온 이가 있는데 바로 니콜라이 달 박사다.
라흐마니노프의 마음을 움직인 니콜라이 달 박사의 치료법은 일종의 ‘자기암시 요법’으로 알려졌다. 치료에 성공한 뒤 라흐마니노프는 시련을 딛고 일어나 다양한 곡을 쓰며 이름을 알리게 됐다. 1901년 라흐마니노프는 ‘피아노 협주곡 제2번 c단조’로 ‘글린카 상’을 수상했고 재기에 도움을 준 니콜라이 달 박사에게 작품을 헌정하며 고마움을 표했다. 역사가 기록한 라흐마니노프와 니콜라이 달 박사의 이야기는 이렇다.
# 달 박사와 김경수, 닮은점 찾기
“달 박사는 굉장히 따뜻한 사람이에요. 그런데 정작 본인은 자신이 얼마나 따뜻한 사람인지 잘 모르고 있어요. 또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이기도 해요. 그게 작품의 메시지와도 연결되죠. 특별한 치료법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지만, 사람의 마음을 여는데 잘 듣는 것 이상의 방법은 없을 거예요. 결국 라흐마니노프가 말을 하고 싶게 만들었잖아요. 대신 진정성 있게 그 사람이 하려는 말을 이해하고 들어주려 했다는 것이 다른 것 같아요.”
닫힌 라흐마니노프의 마음을 열기 위해 니콜라이 달 박사는 비올라 연주를 시작했다. 엉성하기 짝이 없는 연주 실력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온다. 근엄하기만 할 것 같은 정신의학자가 비올라 연주를 하다니, 게다가 실력은 엉망진창이다. 의외의 모습에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은 물론이고 없던 관심까지 생기게 된다.
“초연과 앙코르 공연을 거치며 여러 시도를 해봤어요. 분위기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비올라를 잘 못 켤 때 관객 반응이 더 좋았어요. 또 그 순간 웃는 라흐마니노프를 보면서 비올라는 잘 연주하는 것이 그의 마음을 여는 데 도움이 안 된다는 걸 알았죠. 물론 비올라를 제대로 연주해서 부끄럽지 않고 싶은데, 부끄러움은 제 몫이고 부끄럽지만 라흐마니노프의 마음을 열 수만 있다면 제대로 연주하지 않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초연 무대에 앞서 비올라 연주를 위해 연습 시간을 따로 마련했지만, 이와 같은 판단이 선 뒤에는 비올라 연주에 공을 들이는 시간은 줄어들었다. 엉성한 연주를 위해 특별히 연습할 필요는 없으니까. 대신 니콜라이 달 박사와 더 가까워지기 위해 그와 대화하는 시간을 늘려나갔다.
“달 박사와 계속 대화를 해요. 여기서 어떻게 말하고 싶은지 묻죠. 대본에는 정확하게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나와 있지만 물어봐요. 대본을 고칠 수 없으니 오늘은 이 말에 이런 속뜻을 두고 연기하겠다고 달 박사에게 말해요. 그렇게 대화를 하고 공연을 할 때 만족도가 크더라고요.”
“당신은 이미 사랑받는 음악가입니다.” 니콜라이 달 박사가 라흐마니노프에게 남긴 말이다. 김경수는 이 역시 달 박사가 스스로에게 건네는 말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라흐마니노프에게 하는 말이지만 뒤돌아서는 순간 저에게로 다시 돌아오는 말이기도 하다”며 힘든 순간 기적처럼 마주하게 된 뮤지컬 ‘라흐마니노프’와의 만남에 감사 인사를 전했다. 정말 다행인 것은 김경수와 작품의 만남 만이 아니었다.
“니콜라이 달 박사를 만나 정말 다행이에요. 저와 비슷한 점이 많아요. 저 역시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데 그게 배우 김경수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에요. 매번 새로운 작품을 만나고, 혹은 했던 작품을 다시 올리게 되더라도 자신감이 없어요. 늘 두려움을 느끼죠. 겁도 많이 나고요. 그래서 첫 공연을 올리기 전날에는 걱정 때문에 잠도 못 자고 다음 날 초췌한 모습으로 극장에 가요. 달 박사는 그 분야에서 전문가이지만 열등감 덩어리에요.”
열등감의 사전적 의미는 ‘자기를 남보다 못하거나 무가치한 인간으로 낮추어 평가하는 감정’이다. 김경수는 이러한 열등감의 원인을 “최고가 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목표”에서 찾았다. 성장을 거듭하며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배우, 관객이 평가 역시 나쁘지 않은 배우가 보인 열등감은 낯설게 다가왔다. 의아하기까지 했다.
“다른 사람을 이기고 싶지는 않아요. 그렇다고 지는 것도 싫어요. 뒤처져 있으면 고통스러워요. 모순된 감정인 것 같지만, 정신의학자라는 직업도 그렇고 배우라는 직업도 그렇고 누군가를 이기기 위해 존재하는 직업이 아니에요. 가끔 잘하는 배우를 보면 ‘나는 왜 저 친구처럼 안 될까’, ‘나는 왜 저렇게 훌륭한 아이디어를 내지 못할까’, ‘나는 노래, 연기를 왜 저렇게 할 수 없을까’ 싶어 열등감이 생기곤 해요. 그럴 때마다 더 저를 채찍질하고 이겨내려 하죠.”
열등감은 긍정의 단어가 아니다. 자칫 잘못 다뤘다간 끝없는 어둠 속으로 나를 잠식시킨다. 김경수는 그런 열등감을 사랑했다. 열등감이 자신의 머리채를 잡고 끌고 가도록 지켜봤다. 그러한 과정이 반복될수록 자신 역시 성장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에게 괴로움의 순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좋은 작품을 만나 좋은 결과를 내도 열등감이라는 녀석이 늘 찾아와 그를 괴로움의 나락으로 떨어뜨린 적도 많았다고.
“경험이 중요한 것 같아요. 제가 힘든 시절을 보내지 않았더라면 이런 생각도 못 했을 거예요. 그때는 정말 힘들었어요. 물론 지금도 힘들긴 하지만 그 힘듦이 저에게 좋은 효과를 가져다준다는 것을 이제는 알죠. 그래서 저는 이 고통도 일종의 즐거움이라 생각하며 살고 있어요.”
# 달 박사가 전한 위로의 순간
우리가 알고 있는 라흐마니노프. 뮤지컬 ‘라흐마니노프’ 속 라흐마니노프는 같은 인물이지만 배우가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그날 관객이 받은 감동에 따라 미세하게 다른 색을 띤다. 김경수가 바라본 라흐마니노프도 그렇다. 그는 “물가에 내놓은 아이 같았다”고 첫 만남을 떠올렸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어린아이 같았어요. 그러다 다치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됐죠. ‘아이’라고 하면 흔히들 챙겨줘야 하는 대상으로 생각하잖아요. 라흐마니노프는 위태로울 뿐이지 생각이 깊은 아이였어요. 니콜라이 달 박사도 라흐마니노프를 만나 정말 다행인 것 같아요. 작품은 두 사람이 만나 동시에 성장하는 과정을,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요. 라흐마니노프가 달 박사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달 박사 라흐마니노프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상상하고 싶지도 않아요. 물론 지나간 역사적 사실이라 해도.”
서로가 얼마나 닮았는지 알지 못한 채 처음 만났다. 마음을 닫고 있는 라흐마니노프를 바라보는 니콜라이 달 박사의 마음은 어땠을까. 진심으로 그를 치료하고 싶다는 마음을 먹은 계기는 언제일까. 판단이 서기도 전에 자연스럽게 스며든 두 사람의 이야기에 관객은 위로를 받고 눈시울을 붉힌다.
“극중 라흐마니노프가 달 박사에게 ‘왜 치료하고 싶으냐’고 묻는 장면이 있어요. 그동안 질문은 주로 달 박사가 해왔어요. 자신이 대화를 리드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질문을 받는 순간 주도권이 바뀐 느낌을 받죠. 그 말을 들으니 떠날 수 없더라고요. 분명 치료를 해야 하는 이유가 있었는데 질문을 받는 순간 멍해지죠. 그 말 때문에 라흐마니노프를 치료할 수밖에 없게 된 것 같아요.”
라흐마니노프의 연주를 옆에서 듣고 있을 때면, 김경수는 극중 인물이 아닌 인간 김경수가 되곤 한다.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애쓰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 벌어지는 일을 막을 도리는 없었다. 때로는 라흐마니노프가 되기도 한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위로를 받는 순간이 찾아와 작품에 대한 애정은 더욱 깊어진다.
“보통의 경우 2~3개월 정도 한 시즌을 해요. ‘라흐마니노프’는 다 합쳐도 2달 정도예요. 처음 작품을 제안받았을 때 니콜라이 달 박사에 더 매력을 느꼈어요. 라흐마니노프 역도 도전해보고 싶기는 해요. 그 나름의 매력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달 박사에 집중해야 할 때인 것 같아요. 달 박사를 내려놓기에는 아직 덜 가까워진 느낌이에요.”
위로의 아이콘이 된 라흐마니노프와 니콜라이 달 박사. 작품은 관객에게도 배우에게도 따뜻한 위로를 전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럴 것이란 확신을 안겨줬다. 마지막으로 김경수는 “조금 더 따뜻해지고 깊어진 달 박사로 인사드리고 싶다”며 “진정성 있게 라흐마니노프의 말을 생각하고 깊이 있게 마음을 공유할 수 있는 달 박사로 찾아뵙겠다”고 극장을 찾을 관객과 약속했다.
사진 홍혜리·에디터 백초현 yamstage_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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