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은 행진 중이며, 그 무엇도 그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La vérité est en marche et rien ne l'arrêtera.)”
1898년 1월 13일, 습관처럼 일간지 ‘로로르’를 펼쳐 든 프랑스 사람들은 분명 깜짝 놀랐을 것이다. 드레퓌스 사건*과 관련하여 ‘나는 고발한다(J'accuse)’라는 제하에 1면을 빼곡하게 채운 격문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글의 작성자가 에밀 졸라라는 점 때문에 더욱.
놀라움은 분노가 되고, 분노는 낙인이 되어 졸라는 빅토르 위고에 비견할 만한 프랑스의 대문호에서 유대인을 편드는 매국노로 대중의 뭇매를 맞는다. 모두가 원하는 거짓에 맞서 진실을 말했다는 이유만으로 졸라가 치러야 했던 대가는 컸다. 분노한 군중은 거리로 뛰쳐나와 졸라의 초상을 불태우고 유죄 판결을 받은 졸라는 영국으로 망명했다가 프랑스로 돌아오지만 끝내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다.
그리고 졸라가 쓴 ‘나는 고발한다’(원제는 프랑스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 Lettre au President de la Republique)는 뮤지컬 <에밀>의 첫 넘버로 다시 태어난다. 1894년, 프랑스를 뒤흔든 드레퓌스 사건 이후 8년이 지난 1902년 9월 28일 밤. 어두운 서재에서 에밀(박유덕 분)은 고통스럽고 복잡한 감정을 담아 ‘나는 고발한다’를 부르며 극의 시작을 알린다.
<에밀>의 첫 넘버가 ‘나는 고발한다’인 것은 지극히 당연한 배치인 동시에, 이 극이 앞으로 어떤 결말로 흘러갈지 그리고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노골적으로 암시한다. 불안한 밤, 낯선 방문자 클로드(정지우 분)를 집 안에 들이며 시작되는 둘의 대화는 이성과 감성, 지성과 감수성, 신뢰와 의혹 사이를 오가며 드문드문 이어지는데 그 구성이 다소 몽환적이다. 초반부가 다소 늘어진다고 느낄 수 있으나 관객들로 하여금 클로드의 정체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게 만드는 대사들과 공간적 배경의 전환 없이도 장면을 구분하게 하는 정전, 진실게임, 만취한 꿈 속 등 연출을 따라 함께 밤을 지새다 보면 어느새 클라이맥스에 다가와 있다.
그리고 관객인 우리는 이 극의 결말부에서, 피를 토하는 듯한 에밀의 외침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120년의 시간을 뛰어넘은 기묘한 가슴 떨림을 경험하게 된다. 아나톨 프랑스가 ‘양심의 위대한 순간’이라 불렀던 에밀의 입으로, 불의한 거짓과 맞서 진실을 말해야 하는 지식인의 사명과 용기가 담긴 넘버를 들으며 고요하게 뜨거워지는 경험이다.
뮤지컬 <에밀>은 창작 초연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의 장점을 두루 갖추고 있다.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과도하게 왜곡하거나 자극적으로 변형시키지 않았고, 시작부터 끝까지 올곧은 서사적 흐름을 유지하고 있다. 안정적인 구성과 고민을 많이 한 흔적이 보이는 연출, 에밀의 서재에 함께 앉아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는 제3자가 된 듯한 느낌을 주는 무대미술은 물론, ‘나는 고발한다’를 시작으로 ‘이 펜은 내게 말을 걸어’, ‘빠담빠담’, ‘진실은 행진한다’ 등 매력적인 넘버들이 귀를 매혹시킨다. 여기에 내공 있는 배우들의 밀도 높은 연기가 어우러져 작품의 완성도를 끌어올린다.
그럼에도, 개인적으로 느낀 아쉬움이 있다. 뮤지컬 <에밀>을 보기 위해서는 ‘나는 고발한다’가 써진 배경인 드레퓌스 사건에 대해 간단하게라도 알아야 한다는 점이다. 극을 이해하기 위해 극 외부적인 노력과 이해가 필수가 되는 상황은 반갑지 않다. 극 중에서 구술로 드레퓌스 사건을 일일이 설명할 수야 없겠으나, 극의 중심 소재이자 주제와 밀접하게 연관된 사건이다 보니 드레퓌스 사건의 발단과 진행에 대한 이해가 없을 경우, 초반 인물들의 대화에 몰입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문득, 진실이 무용한 시대에 에밀을 쓰면서 작가는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해진다. 이 극을 보러 극장을 찾은 사람들이 후반부 눈물을 삼키며 에밀의 굳건함과 클로드의 선택을 지켜보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남아있는 희망의 불씨는 아닐까. 그렇다면 어떤 의미로 <에밀>은 판도라의 상자 같은 극일지도 모른다. 뮤지컬 <에밀>은 9월 1일까지 예스24스테이지 3관에서 상연된다.
*기사 내 캐스트 언급은 에디터 관람 회차 기준입니다.
에디터 김희선 yamstage_@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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