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모차르트처럼 살기를 강요당했다. 아버지는 아들을 훌륭한 음악가로 키우기 위해 모진 말을 내뱉었다. 그의 삶에 베토벤은 없었고 모차르트만 남았다. 끔찍했던 유년 시절을 겪은 그에게 음악은 감옥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베토벤은 재능이 있었고, 음악의 재미 또한 일찌감치 깨우쳤다. 한순간에 답답했던 감옥이 환희로 가득한 꽃길이 됐다.
인생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환희가 끝나기도 전에 좌절을 선물했다. 귓가에 속삭이던 아름다운 음악은 사라졌고, 소리를 잃게 된 베토벤은 술독에 빠져 피폐한 삶을 이어갔다. 모든 것을 놓고 포기하려는 순간 마리와 발터가 그를 찾아왔다. “발터에게 음악을 가르쳐주세요.” 총을 들었던 손에는 청진기가 들려 있고, 죽음의 순간을 함께 할 뻔했던 피아노는 아름다운 선율을 연주하는 악기로 다시 제 역할을 찾았다.
“베토벤의 삶을 다룬 작품이다. 그가 어떤 고뇌를 했으며, 어떤 순간 행복을 느꼈는지, 어떻게 생을 마무리했는지 보여준다”고 뮤지컬 ‘루드윅’을 소개한 배우 이용규와 함께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눠봤다. 그는 이번 공연에서 청년 루드윅과 베토벤의 조카 카를 역을 맡아 무대에 오른다.
# 뜨거운 열기, 빠져들 수밖에
“추정화 연출과 허수현 음악감독과 작품을 같이 한 적이 있어요. ‘루드윅’ 초연 당시 연습실에도 자주 놀러 갔었죠. 공연도 봤는데 정말 좋았어요. 워낙 에너지 좋은 배우들이 많아 그런지 그 열기가 대단하더라고요. 대본도, 음악도 다 좋았어요. 정말 함께하고 싶은 작품이었어요. 찡한 감동도 있고요. ”
단번에 사로잡혔다. 매료됐다. 표현할 수 없는 먹먹함이 이용규를 휘감았다. 자신이 그와 같은 상황에 놓이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상상하면 할수록 감당할 수 없는 감정들이 휘몰아쳤다. 이용규는 “그만큼 ‘루드윅’ 무대에 오르는 배우들이 대단해 보였다”라면서 “연습하는 내내 눈물이 터져 나와 대사를 이어갈 수 없다”고 회상했다.
“기존 배우들이 워낙 작품을 잘 만들어놨어요. 이미 공연을 봐서 그런지 몰라도 대본을 처음 읽었을 때 흐름이 보이더라고요. 내가 어디에 연기 포인트를 둬야 하는지 파악하는 것이 조금은 수월했어요. 작품은 ‘상실’을 이야기하고 있어요. 청년 루드윅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요. 청력을 ‘상실’하죠. 카를은 엄마와 떨어져 삼촌과 지내면서, 자신이 원하지 않는 삶을 강요당해요. 나를 잃은 ‘상실’이죠. 그런 상실에 개인적으로 공감이 됐어요.”
베토벤의 삶을 다룬 많은 작품과 다른 ‘루드윅’만의 차별점, 그것은 바로 ‘인간 베토벤의 삶을 조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공연을 보는 것만으로도 베토벤의 삶을 다 본 것 같은 착각이 들정도. 이용규 역시 처음 객석에서 공연을 본 후 이와 같은 말을 추정화 연출에게 한 적 있다고 고백했다. “베토벤의 삶을 모두 본 거 같아요.”
그러면서도 이용규는 인터뷰 내내 배우들을 향한 아낌없는 칭찬을 쏟아냈다. “능력치가 정말 다들 좋다.” 이 한마디면 충분했다. 배우가 무대에 오르면 자연스럽게 공기의 흐름이 바뀌었다. 환희에서 절망, 절망에서 다시 희망으로. 실시간으로 만들어지는 열정, 그 열기가 관객에게도 좋은 영향력을 끼칠 거라고 그는 확신했다. 뜨거운 열기는 이용규에게도, 관객에게도 잊지 못할 감동과 깊은 여운을 남겼다.
“이렇게 좋은 에너지를 가진 배우들이 한 무대에 오르기 힘든데, 그 배우들이 온전히 극에 몰두해 연기를 펼쳐요. 연습 과정에서도 허투루 하지 않고 늘 모든 에너지를 쏟아내요. 그러한 에너지는 물론이고 ‘루드윅’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관객에게 충분히 닿을 거로 생각해요. 이렇게 뜨거운 작품은 정말 오랜만이에요. 그만큼 더 많은 관객이 봐주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 모차르트 아닌 베토벤, 발터 아닌 카를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아버지의 바람대로 모차르트를 지울 만큼 훌륭한, 유명한 음악가가 됐다. 빈에서의 연주회도 성공적으로 마쳤다. 완벽하다 할 수 있는 그날 이후, 모든 것이 무너져 버렸다. 음악을 쏟아냈던 귀는 아무것도 들을 수 없는 상태가 됐다. 세상은 ‘베토벤이 청력을 잃었다’고 수근 거렸다.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무리해 연주회 무대에 올랐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소문은 더이상 소문이 아니게 됐다. 현실이 돼버렸다. 들리지 않는 귀에 베토벤은 좌절하고 나락으로 떨어졌다.
“청년 루드윅과 카를은 가장 소중한 무언가를 잃었다는 공통점이 있어요. 청년 루드윅은 청력을 잃었고, 그로 인해 좌절하고 분노해요. 그 울분을 토해내며 신과 맞서 싸우기도 하죠. 자살을 결심하기도 하는데 발터라는 아이의 등장으로 그마저도 실패해요. 이후에는 모든 것을 이겨내고 음악가로서 성장하죠. 이처럼 베토벤의 가장 큰 성장기를 살아가고 있는 인물이 바로 청년 루드윅이에요.”
삼촌은 카를을 발터라 불렀다. 죽은 발터가 살아 있는 듯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자꾸만 발터의 이름을 외쳤다. 소년은 삼촌의 이름인 ‘루드윅’을 이용해 총싸움을 시도했다. 삼촌과 총싸움은 한순간에 분위기를 전환했고, 무대에도 객석에서도 웃음소리가 베시시 새어 나왔다. 얼마 만에 맞이한 행복인가 싶은 순간 또 다시 시련이 찾아왔다. 열정의 대물림.
“카를은 정말 외로운 아이예요. 가족과 떨어져 삼촌과 살아요. 물론 삼촌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결국 그 사랑이 집착으로 바뀌어요. 그래서 본인은 감옥에 갇혀 있다고 생각하죠. 소중한 것을 자신 곁에 둘 수도 없고,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도 없는 상황에 답답함을 느껴요. 저라도 답답할 것 같아요.”
극 초반 청년 베토벤으로 무대에 오른 뒤 극 후반부터는 베토벤의 조카 카를로 관객과 만난다. 1인 2역의 어려움은 관객에게 전혀 다른 인물로 보여야 한다는 것. 그렇기에 이용규는 청년 루드윅을 연기하기 전 베토벤 역을 맡은 배우들의 모습을 더더욱 주의 깊게 관찰했다. 그는 날카롭게 그들만의 특별한 행동을 포착했고, 신경질적인 그들만의 집착에 집중했다.
“인생이 다이내믹해요. 다양한 감정을 표현하기 좋은 인물이죠. 그만큼 베토벤을 통해 다양한 모습을 만날 수 있어요. 청력을 잃고 신에게 따지지만, 답을 들을 수 없어 답답해해요. 죽고 싶은데 죽을 수도 없어요. 술을 마시고 또 마시면서 그의 삶은 점점 더 피폐해져 가죠. 그러다 마리의 말을 듣고 깨달음을 얻어요. 청력을 잃은 것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음을 알게 되죠. 내 안에 음악이 가득했다는 것을 깨닫는 과정을 단순하게 ‘슬프다’, ‘기쁘다’, ‘화가 난다’의 감정으로 정리할 수 없어요. 정말 복잡한 감정들로 얽혀 있죠. 공연을 준비하면서 연기 공부 제대로 했어요.”
음악가로서 명성이 대단했던 베토벤. 베토벤은 조카 카를과의 첫 만남 이후 그를 아들로 삼았다. 법원의 판결을 받아내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카를이 친모와 만나려 할 때면 잔뜩 예민해진 모습으로 버럭 화를 내기도 했다. 아들과 엄마의 만남을 거부하고 카를을 자신 품에 꽁꽁 숨겼다. 그럴수록 카를은 답답함을 호소하며 밖으로 달아나려 안간힘을 썼다.
“같이 살 때는 알지 못해요. 나중에 베토벤이 죽고 나서 뒤늦게 깨닫죠. 자신에게 있어 삼촌은 아버지였다는 것을요. 실제로 베토벤 장례식이 있던 날 휴가 나온 카를이 엄청 울었다고 하더라고요. 삼촌이 죽고 난 뒤에 자신을 키워준 아버지로서 삼촌의 사랑을 느껴요.한편으로는 음악가로서 엄청난 재능이 있던 베토벤에게 음악을 배운 카를이라면, 누군가에게 빛나는 빛이 자신에게는 날카로운 바늘처럼 느껴졌을 거예요. 그럴 때마다 ‘내가 어떻게 당신처럼 돼?’라는 생각으로 베토벤을 바라봤을 것 같기도 해요. 사랑하고, 존경하고, 동경하는 한편 경멸하는 이중적인 감정이 있었을 테고요.”
이용규는 ‘상실’이라는 단어를 내뱉은 이후, 줄곧 그 감정에 동화됐다. 최근 그 역시 이러한 상실을 경험한 바 있어 더욱 그렇다고. 청년 루드윅은 신에게 따지고 무너지며 엄청난 감정을 쏟아낸다. 슬플 때 눈물을 보이는 것이 유일한 표현 방법이었던 이용규는 ‘루드윅’을 통해 “슬픔을 표현하는 방법이 우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이야기했다.
“어렸을 때 할머니와 함께 살았어요. 저에게는 할머니가 어머니와 같은 존재예요. 근래에 돌아가셨어요. 그때 큰 상실을 경험했죠. 저에게 있어 중요한 무언가가 잘려나간 느낌이었어요. 청년 루드윅이 느낀, 또 카를이 느낀 상실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래서 공감이 됐어요. 다만 저는 인간 이용규로 그러한 상실감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청년 루드윅과 카를로 표현해야 하잖아요. 그만큼 이 상황에 이 인물이 어떠한 생각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할까 더 많이 고민하게 되는 것 같아요.”
‘루드윅’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치열하게 하루를 살아간다. 아버지의 호된 교육을 받으며 음악가로 성장했던 베토벤은 환희를 만끽한 순간 모든 것을 잃고 좌절을 맛본다. 여자의 몸으로 태어나 건축가가 되기로 결심한 마리는 싸울 준비가 돼 있지 않은 남자들과 맞서기 위해 도전을 계속한다. 군인을 꿈꾸지만 삼촌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던 카를은 재능이 없음에도 불구 피아노 앞에 앉아 곡 작업에 매진한다. 시련이 찾아와도 굴복하지 않는다. 결국에는 모두가 자신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인생을 만들어간다.
“작품이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외려 마리의 대사에 더 많이 녹아 있어요. ‘난 싸울 준비가 돼 있는데 남자들이 준비가 안 돼 있다”는 대사처럼요. 제 역할은 마리의 메시지가 관객에게 명확하게 전달될 수 있도록 더 처절하게 싸우고 갈등하는 거예요. 물론 개인적으로는 관객에게 그런 말은 하고 싶어요. 때로는 무언가를 놓치고 치열하게 살더라도 돌이켜보면 얻은 것이 분명 있을 거라고요.”
# 이용규가 그릴 ‘루드윅’
이용규는 ‘루드윅’에 조금 늦게 투입된다. 그는 공연이 시작되고 약 한달 여 뒤에 무대에 오른다. 그렇다고 연습을 게을리할 수는 없다. 늘 연습실을 찾는 배우 박준휘는 이용규에게 좋은 자극이 됐다. 그는 자신이 경험하고 배운 것을 이용규와 아낌없이 나눴다. 다른 배우들도 마찬가지였다. 김소향은 연습하고 있는 이용규 옆에 다가와 ‘이건 이렇게 하는 게 어떨까’라며 다양한 방법을 제시했다.
“개인적으로 이번에 새롭게 합류하면서 큰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어요. 그래서 총을 드는 타이밍 등과 같은 세세한 부분에서 의견을 많이 제시했죠. 큰 그림을 바꾸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기에 의견을 제시하고 상황에 맞게 조율하는 과정을 반복하고 있어요.”
실존 인물의 삶을 다룬 만큼, 대본 외적으로도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많았다.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인물의 서사를 구축해 나가는 것은 물론이고 극 중 인물이 느낀 감정과 생각에도 집중해야 했다. 이용규는 실존 인물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에 “다른 선택을 해버리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만큼 고민은 깊어졌다.
또 살아온 삶이 아니기에 상상력의 힘을 빌려야 했다. 상상력의 원동력은 평소 보던 웹툰 등과 같은 만화에서 나왔다. 그림 그리는 것을 즐긴다던 이용규는 자신의 머릿속에 펼쳐진 상상의 나래를 그림으로 구체화했다. 여기에 멈추지 않고 그는 자신이 상상한 것을 다른 배우들과 나누며 완성도를 높여나갔다. 이용규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왜’였고, 그 답을 찾기 위해 다양한 상상의 가지를 쳤다. 그는 자신의 상상력이 하루빨리 무대에서 펼쳐지기를, 관객에게 닿기를 희망했다.
“연습실에서 연습할 때는 앞을 보면 사람들이 뭐하고 있는지 다 보여요. 그런 상태에서 연습하면 아무리 애를 써도 온전히 집중 하는데 한계가 있어요. 저는 무대의 힘을 많이 받는 편이에요. 무대에 오르면 앞에 관객이 있어도 잘 안 보여요. 온전히 감정에 집중할 수 있죠. 그런 경험을 빨리하고 싶어요. 내면 깊숙한 곳에 있는 감정들과 만나고 싶은데 연습실에서는 아무래도 힘들더라고요.”
초연을 끝내고 얼마 되지 않아 재연으로 돌아왔다. 새로운 옷을 갈아입은 작품을 봐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기존에 ‘루드윅’을 본 관객이 재연을 봐야 하는 이유로 이용규는 배우들의 ‘케미’를 언급했다. 새롭게 합류한 배우들이 만들어내는 케미는 물론이고, 기존 배우들과의 케미를 놓쳐서는 안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여기에 절대 놓쳐서는 안될 관람포인트를 더 공개했다.
“제가 연기하는 청년 루드윅과 베토벤의 조카 카를의 느낌이 정말 달라요. 색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아요. 또 이번에 새롭게 추가된 넘버가 있는데 정말 좋아요. 개인적으로는 베토벤의 시선을 놓치지 않았으면 해요. 청년 루드윅은 물론이고 마리, 발터를 바라보는 시선이 전부 달라요. 청년 루드윅의 삶에서 저와 시선이 겹치지는 않지만, 뒤에서 몰래 바라보는 베토벤의 시선이 있어요. 그걸 잘 보고 있으면 ‘이때 이 사람이 이런 감정을 느끼고, 이런 후회를 했구나’ 등을 알 수 있을 거예요.”
이용규는 마지막으로 극 중 발터의 대사를 빌려 ‘루드윅’의 매력을 어필했다. “선생님 저는요. 피아노를 치면 가슴이 간질거려요.” “저는 연기할 때 그렇다. 이 공연을 보면 모두 공감하게 될 것이다. 또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라던 그는 “저 역시 공연을 준비하면서, 또 공연을 볼 때 많이 울컥했다. 어릴 때 내가 좋아했던 것을 하지 못할 때 슬펐고 외로웠지, 그런 감정이 관객에게 전달되는 포인트가 전부 다르다. 마리의 대사에 속이 뻥 뚫리기도 한다”고 귀띔했다.
사진 홍혜리·에디터 백초현 yamstage_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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