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이번이 마지막 항해’라고 말하며 바다로 떠났다. 정말 그것이 마지막 항해가 될 줄은 몰랐다. 그저 습관적으로 하는 거짓말이라 생각했다. 항해를 마치고 돌아온 아버지는 술을 마시고 또 마셨다. 그리고 그렇게 떠났다.
아버지의 바다 이야기에는 늘 해적과 선장 잭이 있었다.그들의 무용담은 루이스의 상상력을 자극했고, 글감이 됐다. 아버지가 떠나고 홀로 남겨진 루이스에게 어느 날 잭이 찾아왔다. 아버지에게 늘 들어왔던 그 해적 잭이 눈앞에 나타났다. “세상에!”
무언가를 애타게 찾는 잭.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어쩌면 장미가 그려진 종이를 찾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친 루이스. 조심스럽게 건넨 그 종이에 그려진 아름다운 장미는 그저 단순한 꽃이 아니었다. 해적들만 안다는 신비의 섬, 로우즈 아일랜드. 아버지와 잭의 마지막 항해, 그리고 그곳에 묻힌 그 날의 진실과 마주하기 위한 항해가 시작됐다.
# 항해 일지를 쓰다
“어떻게 보면 새드 엔딩이지만, 그래도 웃으면서 볼 수 있는 극이에요. 그런 묘미가 있어요. 좋은 영화나 드라마, 또는 공연을 보면 울고 있는데 웃음이 날 때가 있잖아요. 반대로 웃고 있는데 눈물이 날때도 있고요. 그런 감정을 ‘해적’을 본 관객도 느낄 거라 믿어요. 잭과 루이스의 헤어짐이 가슴 아프지만 분명 루이스의 이야기 희망을 안겨주기에 그의 앞날을 기대하며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것처럼요.”
백기범은 ‘해적’에 잭과 메리 역으로 캐스팅됐다. 이후 연습 기간을 거쳐 다시 루이스와 앤으로 역할이 변경됐다. 소극장 뮤지컬임에도 불구하고 1막과 2막이 자체적으로 분리되고, 특별한 인터미션 송까지 마련된 ‘해적’. 1막까지 만들어진 상태에서 런을 돌던 중 창작진의 의견으로 역할이 바뀌었다. 그는 “석준 배우에게서 잭 느낌이 났고, 저에게서는 외려 루이스 느낌이 났던 것 같다. 그래서 한 번 바꿔 볼까 하셨는데 그게 하루 만에 진행됐다”고 털어놨다.
“그러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 배우들에게 동의를 구했어요. 안 좋은 결정이라 생각하지 않아요. 초연이기에 얼마든지, 언제든지 대사도 바뀔 수 있고 넘버도 달라질 수 있으니까요. 배역이 바뀌는 것도 마찬가지라 생각해요. 더 좋은 공연을 올리기 위해서라면 납득 못할 이유가 없었어요. 아무래도 처음에는 이미지로 캐스팅을 하다 보니 더 그런 것 같아요.(웃음)”
다양한 선택지가 준비됐다. 그중에서 무엇을 택하느냐에 따라 작품의 결과가 달라졌다. 그러한 과정을 반복한 끝에 백기범은 잭과 메리가 아닌 루이스와 앤으로 무대에 올라 관객과 만나고 있다. 특히 처음 역할이 바뀌었을 때, 엄청난 양의 대사와 비슷한 단어들을 헷갈리지 않고 숙지하는 게 무엇보다 어려웠다고. 그는 “루이스는 해석자 같은 역할이다. 극을 관통하는 서술자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계속 시점을 바꿔가면서 극을 설명해줘야 한다”고 운을 뗐다.
“루이스의 대사를 역할이 바뀌고 나서 3~4일 만에 다 외웠어요. 대본량이 50페이지 정도 됐어요. 물론 1막의 경우 기존에 리딩도 많이 했고 같이 연습을 하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익혀 외우는게 그리 어렵지 않았어요. 계속 듣다 보니 저 역시 자연스럽게 상대 배역의 대사를 외웠더라고요. 그런 시간없이 처음부터 외우라고 했으면 정말 힘들었을 거예요. ”
특별한 경험이었다. 한달 정도 잭과 메리로 살았던 그다. 그렇기에 백기범은 “루이스로 잭을 대할 때라든가 앤으로서 메리를 대할 때 그 감정들이 더욱 공감이 됐다”고 고백했다. 자신이 느낀 감정들이기에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잭과 메리로 무대에 오를 백기범의 날을 기대했지만, 그는 단호했다.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고. 이미 루이스와 앤으로 무대에 오르는 만큼 자신에게 주어진 인물에 최선을 다하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백기범은 ‘해적’ 공연 초반, 허리 디스크가 재발해 한동안 무대에 오르지 못했다. 그를 걱정한 배우들의 응원글이 쏟아졌다. ‘해적’ 팀의 팀워크를 실감하게 하는 순간이었다. 백기범은 “배우 생활 통틀어 이 정도의 팀워크를 경험해 본 적 없다”며 짐짓 자랑스러워했다. 끈끈한 팀워크에 비밀이 있었다. 가장 어린 배우와 가장 나이가 많은 배우의 나이차가 상당한데, 이러한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고.
“노윤 배우가 막내고 김순택 배우가 첫째예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데 그 둘부터 친구처럼 지내버리니 전체적인 팀 분위기가 가족 같을 수밖에 없었어요. 말만 그런 게 아니에요. 2인극이다 보니 무대에서 서로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든 친해져야만 했어요. 그래서 처음부터 모두 다 말을 놓기로 했죠. 나이가 많든 적든 상관없이 편하게 말을 놨어요. 또 한 명의 배우를 정하고 그 배우 집에서 합숙했어요. 돌아가면서 그랬어요. 그래서 더 끈끈한 팀워크를 자랑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우여곡절이 많았다. 덕분에 얻은 것도 많았다. 배우로서 한 뼘 더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그건 분명했다. 백기범은 “무엇보다 앞으로 이렇게 큰 역할을 다시는 못 만날 것 같다”며 “이만큼 대사가 많고, 분량도 많고, 표현해야 할 것도 많고, 그만큼 책임감이나 무게감이 뒤따른 작품을 만나기 힘들 것 같다”고 설명했다. ‘해적’을 만나 그는 자신이 맡은 역할에 책임감을 느끼고 그 책임감을 무대에서 연기로 표현할 수 있는 배우로 거듭났다.
# 굿바이, 마이 캡틴
“루이스는 17세 소년으로,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고 있어요. 그럴 때 어머니는 루이스만 남겨두고 떠났고, 아버지는 매일 해적선을 타러 바다로 나가요. 게다가 바다에서 돌아오면 술만 마시고 잠만 자요. 그러다 세상을 떠났어요. ‘과연 내가 그런 일을 그 나이에 겪으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해봤는데 정말 못 견디겠더라고요. 그런데 루이스는 아니에요. 꿈을 잃지 않고 정말 씩씩하게 버텨요. 그렇기에 잭을 따라 나설 수 있지 않았나 싶어요.”
장미가 그려진 그림, 로우즈 아일랜드. 해적들만 안다는 그 섬으로 떠난다는 잭의 말에 루이스는 자신도 따라나서겠다고 억지를 부린다. 어려서, 위험해서, 안된다는 잭의 말에도 불구 그는 고집을 부린다. 결국 보물섬 지도를 꿀꺽 삼켜 버리는 것으로, 자신을 데리고 가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을 만들어낸다. 보통내기가 아니다.
“루이스는 아버지를 정말 사랑했어요. 아버지가 아무리 가정에 충실하지 않았다 하더라도요. 그래서 그런 아버지의 흔적을 따라 바다로 나가려 해요. 꿈도 많고,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학교도 관두고 소설을 쓰던 친구인데 아버지를 따라 항해 일지를 쓰려 바다로 떠나는 걸 보면, 이 시대에 보기 드문 굉장히 반듯한 친구라는 걸 알 수 있죠.”
17세 꿈많은 소년을 표현해야 한다. 극 중 인물과의 나이 차이를 줄이기 위해 백기범은 공을 들였다. 그는 “저보다 김순택 배우가 더 힘들었을 텐데 외려 순택 배우가 모태 17세 느낌이 난다. 저는 정말 17세라는 나이로 들어가는 게 힘들었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이에 백기범은 사촌 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그들과 대화를 나누며 17세의 고민을 공유하며 캐릭터에 접근해 나갔다.
“앤이 접근하기 더 힘들었어요. 자신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결혼을 택한 인물이잖아요. 그런 상황에 놓인 인물을 찾는 게 정말 어렵더라고요. 그렇기에 모든 것을 상상으로 준비해야 했어요. 상상으로 설정하고, 그렇게 준비한 것을 같은 배역을 맡은 배우들과 나눴어요. 반대로 상대 역을 맡은 배우들에게도 물어봤죠. 내가 이 대사를 할 때, 이런 행동을 할 때 어떤 느낌으로 다가오는지 등을요.”
아버지의 부재, 그리고 그 자리를 해적 잭이 채운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선장 잭은 바다로 루이스를 데려다줬고, 그곳에서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줬다. 루이스는 아버지에게 잭 이야기를 들어왔다. ‘바다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바다에서 돌아온 아버지를 붙잡고 떼를 쓸 때면, 잭 이야기가 들려왔다. 해적들의 우정에 대해, 그들이 꿈꾸는 바다에 대해.
“잭의 첫인상은 아버지에게 들어온 극악무도한 해적과는 달랐어요. 루이스는 굉장히 똑똑한 아이예요. 첫만남에 잭이 굉장히 허술하다고 느끼죠. 그렇다고 우습게 본 건 아니에요. 극악무도한 잭이 아니라, 루이스는 해적 잭이 가지고 있는 따뜻함과 인간미에 반해 마이 캡틴이라 생각했으니깐요.”
그렇다. ‘해적’ 이야기가 어느 정도 진행되면 관객은 눈치챈다. 잭은 해적이지만 어딘지 많이 부족한 선장이라고. 이미지 메이킹에 능하고, 치고 빠질 때를 잘 알아 오래 살아남았을 뿐이라고. 그러나 백기범은 그마저도 루이스가 사랑한 선장 잭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진정한 리더의 자질”. 그것을 갖춘 이가 바로 잭이라는 설명이다.
“잭은 선원들을 말로 다룰 줄 알아요.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말이죠. 요즘 시대에 우리가 말하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리더의 자질도 이와 다르지 않아요. 대화로 사람을 리드할 수 있는 리더.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선원들을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이 잭에게서 느껴졌다는 거죠. 그렇기에 잭이 선장으로서자질은 부족할지 몰라도 리더로서는 자질이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똑똑한 우리 루이스다. 그런 루이스가 보인 행동 중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다. 바로 ‘유서 쓰기’다. 소설가를 꿈꾼 소년이기에 글 쓰기가 익숙하고, 모든 것을 적어 내려 하는 본능은 인정하나 갑자기 이 타이밍에 왜 죽기를 결심하고 유서를 쓰는 지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을 때 백기범은 ‘17세 감성’에 집중했다. 연출님의 조언도 이러한 해석에 힘을 실었다.
“부모님을 잃고, 자신만 혼자 남겨졌다는 생각이 드는 거죠. 그런 생각에 갑자기 센티해져요. 얼마든지 유서를 쓸 수 있잖아요. 자신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누가 볼 지는 모르지만 유서를 한 번 써보자 마음먹은 거예요. 물론 루이스 성격상 절대 유서를 쓰고 죽을 친구가 아니에요. 극에서도 유서를 쓰자 마음먹고 몇 초도 안 돼서 ‘뭐 하는 거야’라며 고개를 저어요. 17세스러운 모습을 가장 잘 표현한 장면이죠.”
오묘하다. 루이스를 처음 찾아온 잭이 그러하고, 하워드와 잭의 만남도 그러하다. 현실과 상상, 루이스의 삶과 그의 이야기 속 경계가 모호하다. 그렇기에 ‘해적’은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매회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상상이냐 현실이냐, 오늘은 어디까지가 상상이고 어디까지를 현실로 두느냐에 따라서도 그 결이 달라진다.
“마지막 장면을 어떻게 바라볼지는 관객의 몫인 것 같아요. 다만 저는 그래요. 잭과 하워드의 만남, 외다리의 이야기 등 루이스는 잭과 나눈 말들을 통해 소설을 쓰기 시작해요. 잭이 어렸을 때 하워드를 만났다는 설정이 있는데, 저는 그게 사실이라 믿고 싶어요. 설령 사실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에 준하는 어떤 사건이 있었기에 잭이 하워드를 해적선에 태웠고, 살려둔 게 아닐까요?”
# 나를 증명하다
백기범은 ‘해적’에서 1인 2역, 또는 그 이상의 역을 연기한다. 앞서 그는 주변에서 극중 인물의 캐릭터를 찾을 수 없어 온전히 상상에 맡겨야 했던 만큼 루이스보다 앤의 캐릭터를 구축하는 것이 힘들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럼에도 그는 확실하게 알았다. 앤이 가진 매력을. “너무 멋있고, 당차다. 자기 주관이 뚜렷하고, 카리스마 넘친다. 바로 반할 것 같다”고.
“제가 바라본 앤은 그래요. 그렇기에 제가 연기하는 앤을 바라보는 관객 역시 그런 매력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들고 싶었어요. 등장부터 반하게 하고 싶었죠. 1인 2역을 연기하는 설정이기에 비주얼적으로 큰 변화를 줄 수는 없어요. 에티튜트라고 하잖아요. 설정 자체만으로 반하게 하려 노력하고 있어요.”
잭을 따라 루이스는 바다로 떠난다. 잭을 따라 앤도 바다에 몸을 싣는다. ‘해적’은 바다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들에게 ‘바다’는 어떤 의미를 지닐까. 바다를 꿈꾸고, 동경하고, 그곳으로 가려고 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백기범은 루이스와 앤에게 있어 ‘바다’는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닌다고 귀띔했다. 비슷해 보일 수 있지만 결코 같지 않다는 말도 함께.
“루이스는 아버지가 나보다 좋아했던 바다, 아버지가 그렇게 사랑했던 바다가 도대체 어떤 바다일까 궁금해 잭을 따라가요. 앤은 바다 자체를 동경하기보다는 자신이 꿈꿔온 이상을 찾기 위해 바다로 가는 거죠. 혹은 현실에서의 탈출구 같은 의미로 말이에요. 사생아라는 출신, 어쩔 수 없이 해버린 결혼, 따분한 술집 주인 생활, 그런 현실에서 도피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 그에게는 바다였어요.”
대항해의 시대. 모든 이들이 해적을 꿈꾸던 시대였다. 법의 규제를 받지 않는 곳, 바다에서의 해적선이 그랬다. 해적은 해적들만의 룰로 움직였다. 현실에서의 법은 그곳에서 무용지물이었다.
앤은 잭을 보는 순간 직감한다. 자신이 찾던 전사를 만날, 이상을 실현할 곳이 바다라는 것을. 백기범은 말했다. “앤이 앤으로서, 앤보니가 아닌 그냥 앤으로서,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곳인 동시에 자신이 살아야 하는 의미를 알려주는 장소. 그곳에서 그토록 찾던 전사를 만났기에 잭을 따라 바다로 나오길 잘했다 생각했을 것”이라고.
잭의 해적선에 탑승한 앤은 그곳에서 메리를 만난다. 총을 쥔 앤과 쌍칼을 휘두르는 메리. 두 사람은 운명의 대결을 펼치고 그 대결이 결과 앤이 승리한다. 파도치는 바다에 몸을 내던지려는 메리를 붙잡은 순간, 앤은 대결에서 자신이 이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포로가 된 건 메리가 아닌 자신이라는 것도 함께 말이다.
“앤은 사생아였지만 부잣집의 딸로 자라왔어요. 어릴 때부터 비싼 과외를 받으며 사격을 배웠죠. 그렇기에 잭과의 대결에서 이겨 총잡이로 해적선에 탑승할 수 있었고요. 메리를 보는 순간, 메리가 가지고 있는 날 것 그대로의 거침을 온몸으로 느꼈던 것 같아요. 물론 이러한 해석은 일차적인 이유에 불과해요. 본인이 여성임을 숨기고 있는데, 메리를 보는 순간 같은 처지라는 것을 알았던 거죠. 정체를 숨기고 있다는 것, 거기에서 동질감은 느껴요. 나와는 반대의 사람이기에, ‘반대가 끌리는 이유’처럼 서로에게 끌린 거죠. 메리가 예뻐서, 또는 멋있어서라는 외형적인 이유 때문에 반한 것은 아니예요. 나와는 다른 메리만이 가지고 있는 그 느낌에 매료된 거예요.”
행복한 결말이면 참 좋으련만, ‘해적’은 그런 결말을 향해 달려가지 않는다. 패기 넘치게 시작된 항해의 끝은 비참함만 안겨줄 뿐. 잭은 밧줄춤을 추고, 사람들의 조롱을 받으며 잊혀진다. 메리 역시 마찬가지다. 루이스는 또 다시 혼자 남겨졌고, 앤 역시 ‘살아내보겠다’며 퇴장한다. 과연 제대로 살아낼 수 있을까, 걱정이 되는 순간이다.
“가끔 그런 질문을 받을 때가 있어요. ‘앤과 루이스는 잘 알아서 다시 만났겠죠?’. 확실한 것은 루이스는 잘 살았을 거라는 거예요. 루이스의 소설을 읽고 앤이 다시 루이스를 찾아가 자신의 집안 재력을 이용해 소설 판매량을 높이고, 그렇게 도움을 줬을 것 같기도 해요. 루이스가 쓴 소설이, 해적의 표본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정도로 베스트셀러가 되지 않았을까요?(웃음) 그런 상상을 하는데, 가슴 깊은 곳에서는 부정적인 생각도 있어요. 마냥 행복한 삶을 살지는 않을 것 같아요.”
빈틈이 없었다. 어떤 물음에도 백기범은 척척 답했다. 그가 생각한 인물의 이야기는 흔들림 없이 그려졌고, 고스란히 전달됐다. 백기범은 하나부터 열까지 캐릭터를 설정해 나갔다. 그러려고 노력하는 편이라고 밝힌 그는 “무대에 오르면 돌발적인 상황이 많이 발생하고, 변수들이 항상 발생한다. 그럴 때 애드리브로 상황을 모면해야 할 때도 있는데 디테일을 꼼꼼하게 설정해 놓지 않으면 그 순간 그냥 백기범의 말이 나온다. 그렇기에 완벽하게 루이스, 또는 앤으로 설정 해놔야 다른 대사를 해도 극 중 인물의 말이 나올 수 있다”고 강조했다. 물론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그 순간 완전 다른 인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 힘들어요. 한 인물도 그렇게 하는 것이 어려운데, 두 인물을 연기하려니 더 힘들더라고요. 계속 고민해야 할 지점인 것 같아요. 기본 설정을 발전시킨다는 의미는 아니에요. 배우로서 제가 추구하는 바는 그거예요. ‘기복 없는 배우가 되자’. 첫공과 막공이 똑같은 컨디션을, 같은 캐릭터를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기본적인 설정은 변함없지만, 그 안에서 더 찾을 수 있는 디테일이 있다면 찾아 발전시키는 거죠.”
한 번 타면 내려올 생각을 하지 못한다. 너무나도 재미난 볼거리와 귀를 즐겁게 하는 넘버가 가득하기 때문. 해적선에 탑승하려고 줄을 선 이도 마찬가지다. 내가 탈 자리가 있을까, 언제쯤 자리가 생길까, 나는 해적선에 탑승할 수 있을까 발을 동동 구르며 조바심을 낸다. 백기범은 자신했다. “여러 말을 해 무엇 할까. 직접 와 보면 ‘해적’의 매력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해적선에 탑승하면 왜 해적선에 탑승하려는지, 왜 계속 탑승해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 뒤 인터뷰를 마쳤다.
사진 홍혜리·에디터 백초현 yamstage_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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