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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YAM #1] ‘사의찬미’ 이규형, 사내의 변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배우는 무대에서 오롯이 존재한다. 배우의 시간은 그래서 소중하다. 한 사람의 시간, 그 사람이 보낸 세월이 고스란히 무대에서 펼쳐지기 때문이다. 이렇듯 경험을 축적한 이의 내공은 같은 무대도 다른 색으로 빚으며 새로움을 더한다.

‘사의찬미’는 1926년 8월 4일 실존 인물인 천재 극작가 김우진과 조선 최초의 소프라노 윤심덕이 현해탄에서 동반 투신한 사건을 재구성한 창작 뮤지컬이다. 역사적 사실에 미스터리한 신원미상의 사내라는 허구의 인물을 투입해 그들의 만남부터 배에 탄 후 투신하기 직전까지의 5시간을 밀도 높게 그려낸다.

배우 이규형은 2017년 ‘사의찬미’공연에서 사내 역으로 무대에 오른다. 그가 사내로 관객과 만나는 것은 이번이 네 번째다. 작품이 공연된 횟수와 동일하다. 이규형과 함께 초연부터 재연, 삼연까지의 극중 인물에 대해 짚어봤다.

“초연 때는 정말 인간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 강했어요. 운명의 실체화라고 볼 수 있을 만큼. 그래서 움직임도 엣지(edge) 있게 표현했고요. 연출이 요구한 바도 그랬어요. 어쨌든 사내는 판타지가 가미된 인물이다 보니 그런 부분에 더 초점을 맞췄던 것 같아요.”

‘사의찬미’ 초연에서 사내는 이규형 말처럼 ‘운명의 실체화’에 걸맞게 의문투성이였다. 때로는 악마를 무대에 올려 놓은 것처럼, 보는 이에게 섬뜩함을 선사하기도 했다. 사내는 존재만으로도 관객의 궁금증을 자아냈고, 그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은 작품의 매력을 더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재연에서는 인간적인 감정을 느끼기 시작해요. 어쩌면 자신도 느껴본 적 없는, 혹은 너무 오래돼서 잊었던 감정이 윤심덕이라는 인물에 의해 되살아난 거죠. 낯설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은 그런 기분이에요. 그러다 보니 자신이 세운 목표와 감정 사이에 충돌이 생기게 돼요. 나는 김우진과 윤심덕을 죽음으로 이끌어야 하는데, 그 대상에게 사랑이라고 표현하기는 뭐하지만 굉장히 애매한 감정이 나와 난감한 거죠.”

초연과 재연 사이 사내 캐릭터에도 변화가 생겼다. 이러한 변화는 같은 넘버도 다르게 해석하게 했다. 이규형은 “첫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 나오는 ‘죽음의 비밀’ 넘버에 나오는 ‘허락되지 않은 이야기’, ‘아름답지 않은 결말’이 초연 때는 우진과 심덕을 염두하고 부른 것이라면, 재연에서는 사내의 이야기가 된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삼연 때는 어떨까.

“누가 우진 역을 맡느냐에 따라 느낌이 달라요. 예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애증이 생기기도 하고, 브로맨스 같은 느낌으로 흘러갈 때도 있어요. 초연 때 우진은 사내가 가지고 노는 장난감에 가까웠는데 재연에서는 질투의 대상이 되고, 삼연에서는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한 관계로 변해요. 감정이 없던 사내가 입체적인 인물이 된 거죠.”

극중 인물인 사내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이규형은 김우진 역으로 눈을 돌렸다. 지난 시즌 당시 1차 공연에서는 우진을, 2차에서는 사내를 연기하고자 했던 것. 하지만 그의 바람은 제작사 사정 등으로 무산됐다. 이규형은 “사내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렇게 하고 싶었는데…. 이번에도 주야장천(晝夜長天) 사내만 하고 있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배우의 얼굴에 세월의 흔적이 아로새겨질 때마다 인물도 그에 맞게 성장했다. 이규형과 사내가 함께 한 지 이제 4년 차에 접어들었다. 이번에는 어떤 사내를 만나게 될까? 기대감에 개막일을 손꼽아 기다리게 된다. 이러한 관객의 마음과 달리, 이규형은 아직 확답을 내리지 못한 모습이다. 이번 공연에서 어떤 사내를 보여줄 지 묻는 말에 그는 머릿속에 떠다니는 수많은 ‘이야기’를 정리하기 바빴다.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고민 중이에요. 초심으로 돌아가서 사내를 표현해볼까 싶지만 지금으로서는 예측하기 힘들어요. 재연 때는 연출과 합의해서 사내는 윤심덕을 향한 사랑을 표현하는 방향으로 갔는데 이번에는 사랑이 될지 우정이 될지…. 다만 언제 어떤 감정이 찾아올지 모르기에 어떠한 감정을 염두해 두고 무대에 오르지는 않을 거예요. 매일 느껴지는 순간의 감정을 따라가려고요. 초연 버전으로 연기할지, 재연 버전으로 할지, 아예 새로운 노선으로 갈지는 상대 배우가 주는 자극에 따라 달라질 것 같아요.”

 

# 죽음을 찬양하는 사내

이규형이 바라본 사내는 어떤 인물일까. 쉽게 나올 줄 알았던 대답은 한참이 지난 후에 들을 수 있었다. 너무 방대해 쉽게 풀어 설명하기 위한 시간이 그에게 필요했다. 이규형은 입을 꾹 닫고 먼 곳을 응시하며 골몰했다. 마치 자신만의 시간에 갇힌 듯 그는 사내에 집중했다.

“단단한 돌멩이 혹은 돌덩이일 수도 있고 아니면 바위일 수도 있어요. 그 돌덩이에 틈이 생긴 거죠. 틈이 생기면 어떤 식으로든 돌덩이는 깨지기 마련이에요. 하지만 어떻게 틈이 돌을 깰지는 틈을 만든 사람도, 돌덩이 자신도 알지 못해요. 돌덩이가 사내라면 틈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감정, 혹은 심덕이가 될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될 수도 있어요.”

간단한 비유로 사내가 표현됐다. 다소 어렵게 느껴질 수 있지만 그는 각각의 사물에 사내와 감정, 사내와 심덕, 그리고 우진을 대입시켜 이해를 도왔다. 이규형의 설명은 그간 이해할 수 없었던 사내의 행동이 납득시키며 공연에 기대감을 더했다. 다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은 사내가 죽음을 찬양하는 이유다. 이에 다시 질문을 건넸다.

“일단 사내에게는 ‘죽지 않는 존재’라는 판타지가 있어요. 그에게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그러다 보니 김우진과 윤심덕이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왜 그토록 살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걸까? 어차피 죽게 될 목숨이고, 오래 살아봤자 좋을 것도 없는 세상인데. 그렇다면 인생의 정점을 찍게 될 때, 세상에 이름을 남길 만한 멋진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더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 거죠. 그래서 스스로 죽음을 찬양하게 된 거예요.”




 

사내는 김우진과 윤심덕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두 사람은 죽음을 찬양하는 그에 의해 벼랑 끝으로 내몰린다. 사내는 죽음으로 이끌기 위한 제안을 하고 기회를 제공한다. 무엇을 선택할지는 오롯이 그들의 몫으로 남겨둔 채. 때로는 두 사람의 행보가 자신의 예상을 빗나갈지라도. 사내의 제안은 언제나 유효하다.

김우진과 윤심덕의 선택은 동반 투신이다. 이들의 결말은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다양한 ‘설’을 양성해낸다. 이태리에서 목격됐다, 축음기를 팔기 위한 계획된 죽음이었다는 등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퍼져 나간다. 이제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그 시대는 암울했어요. 특히 지식인들에게는 더 큰 절망과 좌절을 안겼고, 그들을 염세적으로 삶을 바라보게 했어요. 더군다나 뛰어난 능력을 갖춘 여성에게는 훨씬 가혹한 세상이었죠. 그런 와중에 서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났다면, 충분히 함께 바다에 몸을 던질 수 있지 않았을까요? 다만 그것이 생을 마감한다는 의미보다는 바다 너머 새로운 세상을 간다는 것에 가까운 것 같아요. 죽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다 너머 새로운 세상으로 가면 우리가 느끼는 이 고통이 사라질 거란 간절함이었죠.”

 

# 다시 부르리라 ‘사의찬미’

2017년 ‘사의찬미’는 1차 팀과 2차 팀으로 나눠 진행된다. 오는 29일부터 시작되는 1차 팀은 ‘글루미데이’로 공연될 당시 함께한 배우들이 라인업을 구축해 무대에 오른다. 연습실 분위기를 묻는 말에 이규형은 형광등 아래서 음울한 장면을 연기해야 하는 고충은 물론이고 정문성·안유진·정민 등 분위기 메이커를 자처한 배우들 덕분에 진지한 장면을 연습할 때 웃느라 지쳐 힘들다는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이처럼 웃음이 떠나지 않는 연습 현장이지만 집중해야 하는 순간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모두가 눈을 반짝이며 몰입하고 있다고. 이규형은 “함께 해온 시간만큼 믿음이 크기에 부담감은 없다”고 단언했다.

“그동안 수많은 공연을 하면서 가장 효과적인 동선과 장면을 만들어냈잖아요. 이번 1차 팀은 그런 것들을 이야기하지 않아도 서로가 굉장히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당연하다는 듯이 움직여 버릴 수가 있는데, 그렇게 되면 왜 우리가 그런 움직임을 선택했는지 그 이유를 잊어버리기 쉬워요. 그런 부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다시 되짚어 나가고 있어요.”

축적된 기록이 많으면 그만큼 오류도 많을 수밖에 없다. 완벽한 공연이라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면 보이지 않던 빈틈이 눈에 띈다. 아쉬움이 남는다. 아쉬움을 채우기 위해 연출을 비롯한 배우들은 연습 과정에서 오류를 찾아내고 수정 작업을 거치는 등 오늘도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연출도 사람이잖아요. 세월에 따라 생각이 바뀌는 것 같아요. 그래서 ‘예전에는 내가 이런 디렉팅을 줬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게 아닌 것 같다. 이렇게 가보는 것은 어떨까’라면서 수정된 것들을 말해줘요. 그러면 우리가 원하는 그림을 만들기 위해 바뀐 디렉팅 안에서 이것저것 시도해 봐요. 이번에 우진 캐릭터도 달라질 것 같아요. 굳이 예전처럼 표현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거든요.”

3년 동안 구축해온 것을 한 번에 뒤집을 수 없는 노릇이다. 정리하는 데만도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 과정은 힘들지만 배우들 모두 즐거운 마음으로 연습에 참여하고 있다고. 이규형 역시 마찬가지다. 초연부터 함께 해온 배우들과 다시 만나 연기 합(合)을 주고받는 과정만으로도 그에게 이번 공연은 충분히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




 

“원래는 연말쯤에 드라마 촬영이 끝나면 공연을 해야지 생각했어요. 촬영과 공연이 겹치면 연습에 참여할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해요. 그러면 함께한 사람들에게 민폐잖아요. 촬영하는 동안에는 온전히 인물에 집중하고 싶은 마음도 컸어요. 그래서 들어오는 작품을 거절했는데 아마도 이번 ‘사의찬미’가 올해 마지막 공연이 될 것 같아요.”

‘사의찬미’의 매력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 여기에 배우의 열연이 더해지면 그 풍미는 더욱 깊어진다. 그런 탓에 벌써 네 번째 공연을 맞이했지만 여전히 관객 반응은 뜨겁다. 매회 티켓팅 전쟁을 치러야 할 정도. 이규형은 이번에도 새로운 공연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귀띔했다.

“이미 작품을 본 관객들은 이제 배우보다 더 디테일한 부분까지 생각하면서 공연을 관람하는 것 같아요. 작품 자체가 2년 만에 올라오는 거고, 삼연 때 쉬어서 3년 만에 무대에 오르는 배우도 있어요. 했던 배우지만 이번 공연에서 새로운 면모를 만나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여러모로 배우들도 한 사람으로서 성장했기 때문에 보는 재미가 있을 거예요.”

2013년 초연해 네 번째 공연을 맞이했지만 2017년 ‘사의찬미’와의 첫 만남을 앞둔 관객도 있다. 그들 역시 기대감이 큰 것은 마찬가지다. 이에 이규형은 “처음 보는 관객이라면 작품이 어려울 수도 있다”고 운을 뗐다.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을 수 있을 거예요.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살고자 하는 김우진과 윤심덕의 의지, 생명력, 살아가고자 하는 힘이 중요한 것 같아요. 그것이 이번 공연의 포인트예요. 그런 점을 주의 깊게 본다면 분명 ‘사의찬미’를 재미있게 볼 수 있을 겁니다.”

마지막으로 이규형은 ‘사의찬미’에 임하는 각오로 “재미있게 하고 싶다”고 답했다. ‘재미있게 한다’는 그의 말에는 ‘무대에서만큼은 누구보다 사내 그 자체가 되고 싶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사내의 재미를 위해 모든 판이 시작돼요. 그래서 두 시간 동안 무대에서 사내처럼 재미있게 놀고 싶어요. 저도 일이 없을 때는 책도 보고 티브이도 보고 그러다 정 할 일이 없으면 잠을 청하죠. 그래도 심심하면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뭐 재미난 일 없느냐’고 물어봐요. 사내가 수백 년을 그렇게 살았다고 생각해 보세요. 약간 변태 같아 보일 수도 있지만 김우진과 윤심덕이라는 재미난 장난감을 발견한 거잖아요. 그가 추구하는 재미를 저 역시도 고스란히 무대에 그려내고 싶어요.”

 

사진 제공 : 네오

 

에디터 백초현 yamstag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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